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티 미클로시 (문단 편집) ===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 해군]]의 제독 === [[제1차 세계 대전]] 때는 [[합스부르크급 전함]] SMS 합스부르크와 SMS 노바라의 [[함장]]으로 근무했다. 주요 상대는 [[영국 해군]], [[프랑스 해군]], [[이탈리아 왕립 해군]]이었다. 이탈리아는 해군력이 빈약하였고, 프랑스는 해군 강국이었으나 [[지중해]]에 전개시킨 전력은 미약했기에, 호르티는 두 나라의 해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. [[1917년]] 5월 [[아드리아 해]]의 출입구에서 벌어진 [[오트란토 해협 해전]]은 호르티 대령의 명성이 [[동맹국]]은 물론 [[협상국]]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. 당시 오스트리아-헝가리 해군은 함대사령관 [[안톤 하우스]] 원수의 방침에 따라 전함을 비롯한 주력함을 [[현존함대]] 전략으로 보존하는 대신 [[U보트]]를 통한 지중해에서의 통상파괴전에 주력하고 있었다. 연합군은 이에 맞서 저인망 어선과 함대를 배치하여 [[아드리아 해]]의 출구인 오트란토 해협을 봉쇄하였다. 호르티는 정찰 순양함[* 경순양함의 일종] SMS 노바라를 비롯하여 장갑순양함 1척, 경순양함 3척, 구축함 4척을 이끌고 출격하여 해협을 봉쇄중인 어선들을 개발살냈고[* 작전 목표 자체가 적 해군력 파괴가 아니라 (유보트를 위한) 해협봉쇄 돌파였으니, 봉쇄에 참가중이던 저인망 어선들에 상당한 타격을 가한 시점에서 이미 작전은 성공이었다.] 곧이어 출동한 영국, 프랑스, 이탈리아 해군과 교전을 벌였다. 적절한 지휘로 호르티는 연합군의 구축함 2척과 지원함 2척, 어선 14척을 격침시켰고 반면 동맹군 측은 격침당한 함선없이 귀환하였다. 이 전투의 결과로 연합군은 해협봉쇄에 참여중인 어선들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쓰란토 해협 봉쇄를 제한적으로만 실시하면서,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의 유보트에게 다시 지중해로 나가는 길이 열렸다.[* 저인망 어선의 해협 봉쇄는 낮 시간 동안에만 진행해야 했고 15시 무렵에는 봉쇄를 풀어야 했다.] 호르티는 전투 도중 중상을 입고 귀환하였지만,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다. 이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[[1918년]] [[2월]]에는 카타로 항에서 벌어진 제국 해군의 [[반란]]까지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서 [[소장(계급)|소장]](Rear Admiral)으로 진급했고, 제국이 해체되기 직전에는 [[중장]]으로 진급했다. 그리고 막시밀리안 녜고반 대장의 뒤를 이어 오헝 제국 해군 최후의 함대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